16살에 웅포 출신 명의 행원 김상영 선생 애제자 돼 18년간 수학

아버지 같은 스승 유지 받들어 63년 주민 건강지킴이 외길 인생

황등면 황등로 159-1 ‘곰개한약방(☎063-856-6666),’ 황등새마을금고 맞은편에 있는 이곳은 황등 사람치고 모르는 이 없는 유명한 약방이다.

약방이 생긴 지는 대략 50년 전쯤 되지만,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면 70년의 길고 긴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

160평 1층 약방엔 오래된 약장과 빛바랜 휘호 액자가 걸려 있다. 책꽂이엔 60년은 한참 지나 보이는 한자로 쓴 손때 묻은 동의보감 책이 쌓여 있다. 벽에는 표창장과 감사장이 줄지어 걸려 있고, 대통령이 준 훈장과 익산군민의 장, 황등면민의 장도 붙어 있다.

63년 간 주민 건강지킴이 역할을 해오고 있는 약방 주인 장현순 어르신(78)은 고향이 용안이다.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용안 사람이 어떻게 연고 없는 ‘곰개(웅포)’ 지역을 약방 이름으로 지었을 까?

어르신은 “약방 얘기를 하자면 우리 스승님의 얘기부터 해야 한다”며 1시간30분가량 긴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웅포 출신 명의 김상영 선생의 애제자

어르신은 웅포 맹산리 출신인 ‘행원 김상영 선생(1890년~1966년, 김환생 익산웅포우체국장 조부)’의 제자다. 행원선생은 웅포면 입점리에 사는 ‘김 주사’라는 명의에게서 한의학을 배웠다. 당시 일제 치하 때는 지금의 한의사 명칭을 ‘의생’이라고 했다.

행원선생은 해방 후 옛 황등장터에서 한참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제창당 한의원’을 세웠다. 옛날 장터는 지금의 장터보다 북쪽으로 멀리 있었다.

한의원에 큰 화재가 난 후 행원선생은 남쪽으로 이사해 지금의 열린의원 자리에 ‘삼성당 한의원’으로 다시 개원했다.

외과의사 한 명 없던 시절 한의사인 행원선생은 황등 일대 유일한 의사나 마찬가지여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어르신이 행원선생의 제자가 된 건 그의 나이 16살이었다. 용안에서 강경중학교 야간부를 다닐 때 행원선생 제자의 권유를 받고 한의원을 찾았다. 행원선생에게 넙죽 큰 절하고 제자가 됐다. 강경중학교를 8회로 졸업한 후에도 줄곧 18년 동안 수학했다.

‘곰개약방 아들’로 불리다

어르신은 23살 군 입대했다. 군의학교에 입교해 ‘외과기술하사관 16주 과정'을 수료하고 의무병으로 대구육군병원에서 복무했다.

당시 육군병원 군의관이 경북의대 출신이었는데, “제대하면 대구에서 병원을 개원할 테니 밑에서 일하라”고 제안했다. 월급도 3만 원을 준다고 해 흔쾌히 수락했다. 당시 면서기 월급이 7천 원이었으니 지금의 대기업 못지않은 높은 보수였다.

당시 ‘한의사 자격고시제도’가 폐지된 터라 ‘한의약사’ 자격증도 없던 어르신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기회였다.

36개월 만기 제대 후 행원선생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려고 찾았다. 한의학이 전망이 없어 군의관 밑으로 들어가 대구에서 일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행원선생은 “지금까지 너를 기다렸는데 떠나겠다니, 너 아니면 벌써 한의원 문을 닫았다. 세상은 쳇바퀴 돌듯 돈다. 한의학이 또 좋아질 날이 있으니 계속하라”고 붙잡았다.

어르신은 두말없이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사죄한 후 한의원에 눌러 앉았다. 행원선생은 고향 웅포에 있는 가족만큼 어르신을 친자식처럼 아꼈다. 밥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며 하루 종일 함께했다.

황등사람들은 어르신을 행원선생 자식으로 여기고, ‘곰개약방 아들’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아버지 잘 계시냐”며 안부를 묻곤 했다. 약방 이름을 ‘곰개한약방’이라 지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련 속 홀로서기, 그리고 스승의 죽음

행원선생은 어르신이 제대한 그해 12월 한의원을 본격적으로 맡겼다. 밑천으로 ‘쌀 20가마 보관증’도 줬다. 약제잔고 약값은 벌어서 갚으라고 했다. 또 한 달에 용돈 5천 원씩만 주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매일 저녁 한의원을 들러 약방문을 점검하고 지도했다.

어르신은 군에서 의무병 경험을 한 덕분에 외과도 어느 정도 봤다. 의사가 없던 시절 그는 죽을 고비에 있는 사람을 살린 적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무면허는 언제 터질지 모른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1960년 대 중반 정부가 무의촌을 일소한다며 한약사 시험을 만들었다. 충남이 ‘보건시범도시’로 선정돼 첫 시험을 치렀다. 어르신은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정부에서 생면부지인 부여군 세도면으로 근무지를 발령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약방을 그곳에서 열 수밖에 없었다.

‘세도약방’ 간판을 걸었지만, 파리만 날려 문만 열어놓고 황등으로 와 한의원을 운영했다.

급기야 익산지역구 국회의원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으며 귀향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1년의 기다림 끝에 지역제한이 풀렸고, 어르신은 떳떳하게 황등에서 약방을 열 수 있게 됐다.

1966년 2월 3일 행원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의식을 갑자기 잃고 쓰러진 후 그날 운명했다. 향년 76세였다. 스승의 임종을 지켜본 어르신은 눈앞이 캄캄했다.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다.

곰개한약방 설립, 사회활동 활발

행원선생의 가족들은 애통해하는 장현순 어르신을 더 걱정했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어르신에게 한의원의 모든 것을 그대로 물려줬다.

1966년 10월 6일 어르신은 삼성당 한의원을 ‘곰개한약방’으로 이름을 바꿨다.

1991년 만학도로 중국 중의대학에 입학해 1996년 졸업했다. 1997년 중국 국가고시인 중의사에 합격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면허로 인정을 하지 않아 한약사 일만 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의사를 두고 진료를 했지만, 지금은 약방만 하고 있다. 단골이 많은데다 옛 향수 때문에 찾는 이들도 많아 언제나 이곳은 사람이 북적인다.

어르신은 사회활동도 활발했다. 황등새마을금고를 설립하고 무보수로 이사장을 지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초대대의원을 역임하며 익산군 새마을운동협의회장도 했다. 황등면 도로확장에 앞장 서는 등 지역사회에 많은 일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윤재장, 익산군민의 장, 황등면민의 장을 비롯해 감사장, 표창장을 받았다.

하지만 새마을운동 당시 도로확장을 위해 약방 건물 일부를 헐어냈는데, 마무리를 잘 하지 못해 약방이 무너졌다. 그 사고로 동생이 죽고 부인은 하반신 마비가 됐다.

어르신은 지금의 황등새마을금고 앞 2층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행원선생이 쓰던 ‘약장’과 휘호가 적힌 액자를 애지중지 아끼고 있다. 약방 2층은 봉사단체인 라이온스 클럽에 무료로 사무실을 내줬다.

어르신은 아버지와 같은 스승의 은덕을 해마다 기리고 있다. 행원선생의 기일 하루 전인 2월 2일 산소를 찾아 국화꽃을 헌화하고 참배한다. 스승의 날과 명절도 잊지 않고 찾는다.

“지금도 행원선생님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스승에게 받은 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 베풀며 여생을 보낼 생각입니다.”

우창수 기자  ikopen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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